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같은 땅을 저마다의 고향이라 부릅니다. 한쪽에는 박해와 생존의 기억이, 다른 한쪽에는 추방과 점령의 기억이 새겨져 있습니다. 두 민족은 같은 거울 앞에서 전혀 다른 역사를 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엇이 갈등을 만드는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은 같은 땅에 대한 두 민족의 정당한 소속감이 충돌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박해의 역사를 거쳐 세운 국가의 안보를 생존의 문제로 여깁니다. 팔레스타인은 1948년 이래의 실향과 점령을 정의 회복의 문제로 여깁니다. 2023년 시작된 가자 전쟁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낳았고, 2025년 10월 휴전이 성립했지만 그 평화는 여전히 불안정합니다. 2026년에도 산발적 충돌과 봉쇄가 이어지는 한편, 국제사회의 안정화 노력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오랫동안 두 국가가 공존하는 해법을 모색해 왔지만, 현실의 합의는 번번이 멀어져 왔습니다. 영토와 안보, 그리고 귀환의 권리가 한데 얽힌 구조가 갈등의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미러 이미징 — 상대를 거울로 보는 착각 미러 이미징은 상대를 나의 절멸을 노리는 존재로 보는 착각입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자국의 소멸을 노리는 위협으로 읽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안보 조치를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시도로 읽습니다. 양측 모두 상대의 행동에서 최악의 의도를 읽어 냅니다. 그래서 한쪽의 방어가 다른 쪽에는 말살로 비치고, 폭력은 다시 폭력을 부릅니다. 필자가 보기에 이 비극의 깊이는, 양측이 서로를 같은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울상으로만 마주해 온 데 있습니다. 알로센트리즘(Allocentrism)이란? 타자(Allo)를 인식의 중심(centrum)에 두는 사고방식입니다. 미러 이미징의 반대 개념으로, 상대를 상대의 언어와 논리로 이해할 때 비로소 협력이 가능해집니다. 알로센트리즘 — 상대의 눈으로 세상 보기 알로센트리즘은 세계의 중심을 나에서 상대로 옮기는 인지적 전환입니다. 이스라...
중동의 혼란을 종교 하나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늘 부족합니다. 그러나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여러 아랍 국가의 정치를 관통하는 깊은 단층선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이 오래된 균열을 알로센트리즘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무엇이 갈등을 만드는가 분열의 기원은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의 후계 다툼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니파는 공동체의 합의를, 시아파는 예언자 가문의 계승을 정통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갈등은 1300년 전의 신학 논쟁이 아니라 현대 정치의 산물에 가깝습니다. 이 단층선은 여러 아랍 국가에서 권력 다툼으로 드러납니다. 이라크는 과거 수니파 소수가 시아파 다수를 통치하였고, 바레인은 지금도 시아파 다수를 수니파 왕정이 다스립니다. 시리아 내전과 레바논의 종파 정치, 예멘의 내전에도 같은 균열이 깔려 있습니다. 수니파 중심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 중심의 이란이 이 구도의 두 축으로서 여러 나라에서 대리 경쟁을 벌여 왔습니다. 여기에 이란이 아랍이 아닌 페르시아 국가라는 점은 종파 위에 민족이라는 또 하나의 긴장을 더합니다. 미러 이미징 — 상대를 거울로 보는 착각 미러 이미징은 상대 진영을 단일한 위협 덩어리로 보는 착각입니다. 수니파 다수 국가는 시아파 세력의 확대를 시아 초승달이라는 포위 위협으로 읽습니다. 반대로 시아파 공동체는 카르발라 이래의 박해 기억 속에서 수니파의 우위를 오랜 억압으로 읽습니다. 같은 종파 지도를 한쪽은 적의 네트워크로, 다른 쪽은 생존의 연대로 봅니다. 그러나 실제 분쟁의 동력은 종교가 아니라 자원과 권력을 둘러싼 정치인 경우가 많습니다. 필자가 보기에, 종파라는 이름표는 진짜 갈등을 가리는 가장 손쉬운 가면일 때가 많습니다. 알로센트리즘(Allocentrism)이란? '타자(Allo)'를 인식의 '중심(centrum)'에 두는 사고방식입니다. 미러 이미징의 반대 개념으로, 상대를 상대의 언어와 논리로 이해할 때 비로소 협력이 가능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