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혼란을 종교 하나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늘 부족합니다. 그러나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여러 아랍 국가의 정치를 관통하는 깊은 단층선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이 오래된 균열을 알로센트리즘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무엇이 갈등을 만드는가
분열의 기원은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의 후계 다툼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니파는 공동체의 합의를, 시아파는 예언자 가문의 계승을 정통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갈등은 1300년 전의 신학 논쟁이 아니라 현대 정치의 산물에 가깝습니다.
이 단층선은 여러 아랍 국가에서 권력 다툼으로 드러납니다. 이라크는 과거 수니파 소수가 시아파 다수를 통치하였고, 바레인은 지금도 시아파 다수를 수니파 왕정이 다스립니다. 시리아 내전과 레바논의 종파 정치, 예멘의 내전에도 같은 균열이 깔려 있습니다. 수니파 중심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 중심의 이란이 이 구도의 두 축으로서 여러 나라에서 대리 경쟁을 벌여 왔습니다. 여기에 이란이 아랍이 아닌 페르시아 국가라는 점은 종파 위에 민족이라는 또 하나의 긴장을 더합니다.
미러 이미징 — 상대를 거울로 보는 착각
미러 이미징은 상대 진영을 단일한 위협 덩어리로 보는 착각입니다. 수니파 다수 국가는 시아파 세력의 확대를 시아 초승달이라는 포위 위협으로 읽습니다. 반대로 시아파 공동체는 카르발라 이래의 박해 기억 속에서 수니파의 우위를 오랜 억압으로 읽습니다.
같은 종파 지도를 한쪽은 적의 네트워크로, 다른 쪽은 생존의 연대로 봅니다. 그러나 실제 분쟁의 동력은 종교가 아니라 자원과 권력을 둘러싼 정치인 경우가 많습니다.
필자가 보기에, 종파라는 이름표는 진짜 갈등을 가리는 가장 손쉬운 가면일 때가 많습니다.
알로센트리즘(Allocentrism)이란?
'타자(Allo)'를 인식의 '중심(centrum)'에 두는 사고방식입니다.
미러 이미징의 반대 개념으로, 상대를 상대의 언어와 논리로
이해할 때 비로소 협력이 가능해집니다.
알로센트리즘 — 상대의 눈으로 세상 보기
알로센트리즘은 분열의 중심을 종파에서 사람과 정치로 옮겨 보는 전환입니다. 수니파 왕정의 강경함을 이해하려면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거나 외부에 포위되었다고 느끼는 불안을 읽어야 합니다. 동시에 시아파 공동체의 저항을 광신이 아니라, 오랜 소외와 차별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종파 갈등의 상당 부분이 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불만의 언어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해법의 자리가 보입니다. 차별과 소외가 줄어들면 종파의 깃발도 동원력을 잃습니다. 같은 구도의 두 축인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앞선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협력의 가능성과 반론
이 균열이 영원하지 않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1970년대만 해도 사우디와 이란은 동맹에 가까웠고, 2023년에는 외교 관계를 복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반론이 있습니다. 1300년 묵은 갈등이 화해 한 번으로 사라지겠냐는 회의입니다. 그러나 종파가 본질이 아니라 도구라면, 정치적 타협으로 그 온도를 낮추는 일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핵심은 분열을 운명이 아니라 선택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역사는 이 적대가 만들어진 것이지 타고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결론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은 미러 이미징이 어떻게 종교를 갈등의 도구로 만드는지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화해의 첫걸음은 상대를 종파의 이름이 아니라 사람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같은 렌즈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 갈등을 분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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