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내성암호,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암호가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안심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공격자는 지금 데이터를 훔쳐 두었다가 훗날 양자컴퓨터로 풀면 되기 때문입니다. 양자내성암호 전환이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 수집 후 해독이라는 공격 모델입니다
공격자가 오늘 통신망을 오가는 암호문을 수집해 보관했다가,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된 뒤 해독하는 방식을 선 수집 후 해독이라고 부릅니다. 영어 약자로는 HNDL입니다.
이 모델에서 위험한 데이터는 오래 보호돼야 하는 정보입니다. 국가 기밀과 국방 정보, 핵심 기술 자료, 장기 보관이 필요한 금융 정보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양자컴퓨터가 현행 암호를 무력화하는 시점을 큐데이라고 부르지만, 그날을 기다렸다가 대응하면 이미 늦습니다. 양자내성암호는 그 시점 이후를 대비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 이전에 완료해야 하는 준비입니다.
쇼어 알고리즘이 공개키의 전제를 무너뜨립니다
공개키 암호는 암호화 키를 공개하고 복호화 키는 감추는 구조입니다. 두 키는 수학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공개키에서 비밀키를 되짚으려면 큰 수의 소인수분해 같은 난제를 풀어야 합니다. 현행 체계의 안전성은 이 난제가 사실상 풀리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1994년 피터 쇼어가 발표한 알고리즘은 그 전제를 흔들었습니다. 충분히 강력한 양자컴퓨터라면 RSA와 타원곡선암호가 기대는 난제를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자내성암호는 양자컴퓨터로도 풀기 어려운 다른 수학 문제 위에 세운 새로운 공개키 암호들을 가리킵니다.
위협은 공개키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로버 알고리즘은 대칭키 탐색 속도를 제곱근 수준으로 단축하므로, 기존 128비트 대칭키는 256비트로 늘려야 같은 안전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양자내성암호 전환에는 10년 이상이 걸립니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는 2016년부터 2024년까지 표준 3종을 개발했습니다. 연구소는 2024년 8월 13일에 이 세 표준을 확정하면서, 8년에 걸친 공모에 25개국에서 82개 알고리즘이 제출됐고 그 가운데 15개가 최종 후보로 좁혀졌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발표문은 전면 통합에 시간이 걸리므로 지금 바로 도입을 시작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시한도 이미 문서에 적혀 있습니다. 같은 연구소가 2024년 11월에 낸 전환 지침 초안은 RSA와 타원곡선 서명, 그리고 키 교환 방식을 보안강도 112비트 기준으로 2030년 이후 폐기, 2035년 이후 금지로 못 박았습니다. 128비트 이상도 2035년 이후에는 쓸 수 없습니다. 오늘을 기준으로 폐기까지 51개월, 금지까지 111개월이 남았습니다.
전환은 제품 하나를 교체하는 일이 아닙니다. 먼저 조직 안에서 암호가 어디에 쓰이는지 목록을 만들고, 장기 보호가 필요해 HNDL 위험이 큰 영역을 선별해야 합니다. 그다음은 기존 공개키와 양자내성암호를 함께 쓰는 하이브리드 단계이며, 안정화된 뒤에야 인증서와 키 관리, 운영 체계 전체를 옮길 수 있습니다.
영향 범위도 넓습니다. 공개키 인프라뿐 아니라 TLS 프로토콜과 가상사설망, 사물인터넷 전반이 대상입니다. 업계에서는 전면 전환에 10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고 봅니다.
국내 양자내성암호 시범 전환도 시작됐습니다
2025년 한국인터넷진흥원은 에너지와 의료, 행정 분야를 대상으로 시범 전환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인증기관 통신과 데이터베이스 암호화처럼 공개키가 쓰이는 요소를 실제로 바꿔 보고 발생하는 문제를 검증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국산 알고리즘인 K-PQC 4종도 선정됐습니다.
현장에서는 부작용도 확인됩니다. 전자서명을 전환하면 인증서 크기가 커지고 검증 성능과 시스템 호환성에 부담이 생깁니다. 그래서 단계적 접근이 불가피합니다. 이 전환은 서버실 안의 일만도 아닙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패스키도 타원곡선 서명을 쓰므로 같은 시한표 위에 있습니다. 그 인증 방식이 무엇을 바꾸는지는 패스워드와 패스키를 비교한 글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합니다. 우리 조직의 어떤 데이터가 10년 뒤에도 비밀이어야 하는지 목록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야기인 공장으로 내려온 피지컬 AI 현장은 이어지는 글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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